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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事成語 풀이 1⧗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苛:가혹할 가, 政:정사 정, 猛:사나울 맹, 於:어조사 어, 虎:범 호
[출전] <禮記> <檀弓記>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사납다는 뜻으로, 가혹한 정치는 백성들에게 있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는 고통보다 더 무섭다는 말.)
춘추 시대(春秋時代) 말엽, 공자(孔子:B.C 551~479)의 고국인 노(魯)나라에서는 조정의 실세(實勢)인 대부(大夫) 계손자(季孫子)의 가렴 주구(苛斂誅求)로 백성들이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어느 날, 공자가 수레를 타고 제자들과 태산(泰山) 기슭을 지나가고 있을 때 부인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일행이 발길을 멈추고 살펴보니 길가의 풀숲에 무덤 셋이 보였고, 부인은 그 앞에서 울고 있었다. 자비심이 많은 공자는 제자인 자로(子路)에게 그 연유를 알아보라고 했다. 자로가 부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부인, 어인 일로 그렇듯 슬피 우십니까?”부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더니 이윽고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는 아주 무서운 곳이랍니다. 수년 전에 저희 시아버님이 호환(虎患)을 당하시더니 작년에는 남편이, 그리고 이번에는 자식까지 호랑이한테 잡아 먹혔답니다.”
“그러면, 왜 이곳을 떠나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여기서 살면 세금을 혹독하게 징수 당하거나 못된 벼슬아치에게 재물을 빼앗기는 일은 없지요.”자로에게 이 말을 전해들은 공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잘 들 기억해 두어라.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苛政猛於虎]’는 것을…‥.”
[주] 태산 :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오악(五嶽) 중 동악으로 중국 제일의 명산. 도교의 영지(靈地).
☑각주구검(刻舟求劍)
刻:새길 각. 舟:배 주. 求:구할 구. 劍:칼 검.
[준말]각주(刻舟), 각선(脚線), 각현(刻鉉) [유사어] 수주대토(守株待兎)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자 뱃전에 표시를 했다가 나중에 그 칼을 찾으려 한다는 뜻으로, 어리석어 시세에 어둡거나 완고함의 비유.)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한 젊은이가 양자강(揚子江)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탔다. 배가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그만 실수하여 손에 들고 있던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뿔싸 이를 어쩐다?’
젊은이는 허둥지둥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 들고 칼을 떨어뜨린 그 뱃전에다 표시를 했다. 이윽고 배가 나루터에 닿자 그는 곧 옷을 벗어 던지고 표시를 한 뱃전 밑의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칼이 그 밑에 있을 리가 없었다.
☑ 간담상조(肝膽相照)
肝:간 간, 膽:쓸개 담, 相:서로 상, 照:비칠 조
(서로 간과 쓸개를 꺼내 보인다는 뜻.)
① 상호간에 진심을 터놓고 격의 없이 사귐. ② 마음이 잘 맞는 절친한 사이.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당대(唐代)의 두 명문(名文) 대가에 한유[韓愈: 자는 퇴지(退之), 768~824]이 있었다. 이들은 함께 고문 부흥(古文復興) 운동을 제창한 문우로서 세인으로부터 한유(韓柳)라 불릴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당나라 11대 황제인 헌종(憲宗:805-820) 때 유주 자사(柳州刺史)로 좌천되었던 유종원이 죽자 한유는 그 묘지명(墓地銘)을 썼다.
자신의 불우한 처지는 제쳐놓고 오히려 연로한 어머니를 두고 변경인 파주 자사(播州刺史)로 좌천, 부임하는 친구 유몽득(劉夢得)을 크게 동정했던 유종원의 진정한 우정을 찬양하고, 이어 경박한 사귐을 증오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 걸해골(乞骸骨)
乞:빌 걸, 骸:뼈 해, 骨:뼈 골
[준말]걸해(乞骸). [원말]원사해골(願賜骸骨).
[동의어]걸신(乞身). [참조]건곤일척(乾坤一擲).
[출전]《史記》〈項羽本記〉,《子春秋》
(해골을 빈다는 뜻으로, 늙은 재상(宰相)이 나이가 많아 조정에 나오지 못하게 될 때 임금에게 그만두기를 주청(奏請)함을 이루는 말.)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에게 쫓긴 한왕(漢王) 유방(劉邦)이 고전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유방은 지난해(B.C. 203) 항우가 반란을 일으킨 팽월(彭越)‧전영(田榮) 등을 치기 위해 출병한 사이에 초나라의 도읍인 팽성[彭城:서주(徐州)]을 공략했다가 항우의 반격을 받고 겨우 형양[滎陽:하남성(河南省) 내]로 도망쳤다. 그러나 수개월 후 군량(軍糧) 수송로까지 끊겨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렵자 항우에게 휴전을 제의했다. 항우는 응할 생각이었으나 아부(亞父:아버지 다음으로 존경하는 사람이란 뜻) 범증(范增)이 반대하는 바람에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안 유방의 참모 진평(陳平)은 간첩을 풀어 초나라 진중(陣中)에 헛소문을 퍼뜨렸다.
‘범증이 항우 몰래 유방과 내통하고 있다’고.
이에 화가 난 항우는 은밀히 유방과 강화의 사신을 보냈다. 진평은 항우를 섬기다가 유방의 신하가 된 사람인 만큼 누구보다도 항우를 잘 안다. 그래서 성급하고도 단순한 항우의 성격을 겨냥한 이간책은 멋지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진평은 장량(張良) 등 여러 중신(重臣)과 함께 정중히 사신을 맞이하고 이렇게 물었다.
“나는 초패왕의 사신으로 온 사람이요.”
사신은 불쾌한 말투로 대답했다.
“뭐, 초왕의 사신이라고? 난 아부의 사신인 줄 알았는데 …….”
진평은 짐짓 놀란 체하면서 잘 차린 음식을 소찬(素饌)으로 바꾸게 한 뒤 말없이 방을 나가 버렸다. 사신이 돌아와서 그대로 보고하자 항우는 범증이 유방과 내통하고 있는 것으로 확신하고 그에게 주어진 모든 권리를 박탈했다. 범증은 크게 노했다.
“천하의 대세는 결정된 것과 같사오니, 전하 스스로 처리하시오소서. 신은 이제 ‘해골을 빌어[乞骸骨]’ 초야에 묻힐까 하나이다.”
항우는 어리석게도 진평의 책략에 걸려 유일한 모신(謀臣)을 잃고 말았다. 범증은 팽성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등창이 터져 75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한다.
[주] 소찬(素饌) : ① 고기나 생선이 들어가지 아니한 반찬. ② 남에게 식사를 대접할 때의 겸양의 말.
등창[背瘡] : 한의학에서, 등에 나는 큰 부스럼을 일컫는 말.
☑ 견토지쟁(犬免之爭)
犬:개 견, 免:토끼 토, 之:갈 지(…의), 爭:다툴 쟁.
(개와 토끼의 다툼이란 뜻.)
① 양자의 다툼에 제삼자가 힘들이지 않고 이(利)를 봄에 비유. 횡재(橫財)함의 비유.
② 쓸데없는 다툼의 비유.
전국 시대, 제(齊)나라 왕에게 중용(重用)된 순우곤(淳于髡)은 원래 해학(諧謔)과 변론의 뛰어난 세객(說客)이었다. 제나라 왕이 위(魏)나라를 치려고 하자 순우곤은 이렇게 진언했다.
“한자로(韓子盧)라는 매우 발빠른 명견(名犬)이 동곽준(東郭逡)이라는 썩 재빠른 토끼를 뒤쫓았사옵니다. 그들은 수십 리에 이르는 산기슭을 세 바퀴나 돈 다음 가파른 산꼭대기까지 다섯 번이나 올라갔다 내려오는 바람에 개도 토끼도 지쳐 쓰러져 죽고 말았나이다. 이 때 그것을 발견한 ‘전부(田父 : 농부)는 힘들이지 않고 횡재[田父之功]’을 하였나이다.
지금 제나라와 위나라는 오랫동안 대치하는 바람에 군사도 백성도 지치고 쇠약하여 사기가 말이 아니 온데 서쪽의 진(秦)나라나 남쪽의 초(楚)나라가 이를 기화로 ‘전부지공’을 거두려 하지 않을지 그게 걱정이옵니다.“
이 말을 듣자 왕은 위나라를 칠 생각을 깨끗이 버리고 오로지 부국강병(富國强兵)에 힘썼다.
☑ 계구우후(鷄口牛後)
鷄‧雞:닭 계. 口:입 구. 牛:소 우. 後:뒤 후.
[원말] 영위계구 물위우후(寧爲雞口勿爲牛後).
(닭의 부리가 될지언정 쇠꼬리는 되지 말라는 뜻. 곧 큰 집단의 말석보다는 작은 집단의 우두머리가 낫다는 말.)
전국시대 중엽, 동주(東周)의 도읍 낙양(洛陽)에 소진(蘇秦: ?~B.C.317)이란 종횡가(縱橫家:모사)가 있었다. 그는 합종책(合縱策)으로 입신할 뜻을 품고, 당시 최강국인 진(秦)나라의 동진(東進) 정책에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있는 한(韓)‧위(魏)‧조(趙)‧연(燕)‧제(齊)‧초(楚)의 6국을 순방하던 중 한나라 선혜왕(宣惠王)을 알현하고 이렇게 말했다.
“전하, 한나라는 지세가 견고한데다 군사도 강병으로 알려져 있사옵니다. 그런데도 싸우지 아니하고 진나라를 섬긴다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옵니다. 게다가 진나라는 한 치의 땅도 남겨 놓지 않고 계속 국토
선혜왕은 소진의 합종설에 전적으로 찬동했다. 이런 식으로 6국의 군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소진은 마침내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임하는 대정치가가 되었다.
☑ 계군일학(鷄群一鶴)
鷄‧雞:닭 계. 群‧羣:무리 군. 一:한 일. 鶴:학 학.
[원말]계군일학(鷄群一鶴)
[동의어]군계일학(群鷄一鶴). 계군고학(雞群孤鶴).
(닭의 무리 속에 한 마리의 학이라는 뜻으로, 여러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뛰어난 한 사람이 섞여 있음의 비유.)
위진(魏晉)시대, 완적(阮籍)‧완함(阮咸)‧혜강(嵆康)‧산도(山濤)‧왕융(王戎)‧유령(劉伶)‧상수(尙秀) 곧 죽림 칠현(竹林七賢)으로 불리는 일곱 명의 선비가 있었다. 이들은 종종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북동부에 있는 죽림에 모여 노장(老莊)의 허무 사상을 바탕으로 한 청담(淸談)을 즐겨 담론했다.
그런데 죽림 칠현 중 위나라 때 중산대부(中散大夫)로 있던 혜강이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했다. 그때 혜강에게는 나이 열 살 밖에 안되는 아들 혜소(嵇紹:?~304)가 있었다. 혜소가 성장하자 중신(重臣) 산도가 그를 무제[武帝:256~290, 위나라를 멸하고 진나라를 세운 사마염(司馬炎)]에게 천거했다.
“폐하,《서경(書經)》의 〈강고편(康誥篇)〉에는 부자간의 죄는 서로 연좌(連坐)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나이다. 혜소가 비록 혜강의 자식이긴 하오나 총명함이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대부 극결(郤缺)에게 결코 뒤지지 않사오니 그를 비서랑(비書郞)으로 기용하시오소서.”
“경(卿)이 천거(薦擧)하는 사람이라면 승(丞)이라도 능히 감당할 것이오.”
이리하여 혜소는 비서랑 보다 한 계급 위인 비서승에 임명되었다.
혜소가 입월하던 그 이튿날, 어떤 사람이 자못 감격하여 와융에게 말했다.
“어제 구름처럼 많이 모인 사람들 틈에 끼어서 입궐하는 혜소를 보았습니다만, 그 늠름한 모습은 마치 ‘닭의 무리 속에 우뚝 선 한 마리의 학[鷄群一鶴]’같았습니다.”
그러자 왕융은 미소를 띠고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혜소의 아버지를 본 적이 없지만 그는 혜소보다 훨씬 더 늠름했다네.”
☑ 고복격양(鼓腹擊壤)
鼓:북‧북칠 고. 腹:배 복. 擊:칠 격. 壤:땅 양.
[준말]격양(擊壤).
[동의어]격양지가(擊壤之歌), 격양가(擊壤歌).
(배를 두드리고 발을 구르며 흥겨워한다는 뜻으로, 태평 성대를 형용하여 이르는 말.)
먼 옛날 중국에 성천자(聖天子)로 이름난 요(堯) 임금이 선정을 베풀어 온 지도 어느덧 50년이 지났다.
하루하루를 태평하게 지내던 어느 날, 요 임금은 정말로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있는지 궁금하여 미복(微服)을 하고 민정(民情)을 살펴보러 나갔다. 어느 네거리에 이르자 아이들이 손을 맞잡고 요 임금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가 이처럼 잘 살아가는 것은[立我烝民(입아증민)]
모두가 임금님의 지극한 덕이네[莫匪爾極(막비이극)]
임금님이 정하신 대로 살아가네[順帝之則(순제지칙)]
마음이 흐뭇해진 요 임금은 어느새 마을 끝까지 걸어갔다. 그 곳에는 하얀 한 노인이 손으로 ‘배를 두드리고[鼓腹]’ 발로 ‘땅을 구르며[擊壤]’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네[日出而作 日入而息(일출이작 일입이식)]
밭을 갈아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니[耕田而食 鑿井而飮(경전이식 착정이음)]
임금님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帝力何有于我哉(제력하유우아제)]
요 임금은 정말 기뻤다. 백성들이 아무 불만없이 배를 두드리고 발을 구르며 흥겨워하고, 정치의 힘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정치가 잘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요 임금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주] 격양 : 나무로 만든 신 모양의 ‘양(壤)’을 땅에 세워 놓고 떨어진 곳에서 다른 ‘양’을 던져서[擊] 맞추는 놀이라는 설과 ‘흙으로 만든 악기를 타는 일’이라는 설도 있음.
☑ 곡학아세(曲學阿世)
曲:굽을 곡. 學:학문 학. 阿:아첨할 아. 世:인간‧세대 세.
[유사어] 어용학자(御用學者).
(학문을 굽히어 세속(世俗)에 아첨한다는 뜻으로, 정도(正道)를 벗어난 학문으로 세상 사람에게 아첨함을 이르는 말.)
한(漢)나라 6대 황제인 경제(景帝:B.C. 157~141)는 즉위하자 천하에 널리 어진 선비를 찾다가 산동(山東)에 사는 원고생(轅固生)이라는 시인을 등용하기로 했다.
그는 당시 90세의 고령이었으나 직언을 잘하는 대쪽같은 선비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사이비 학자들은 원고생을 중상비방(中傷誹謗)하는 상소를 올려 그의 등용을 극력 반대했으나 경제는 끝내 듣지 않았다.
당시 원고생과 함께 등용된 소장(小壯) 학자가 있었는데, 그 역시 산동 사람으로 이름을 공손홍(公孫弘)이라고 했다. 공손홍은 원고생을 늙은이라고 깔보고 무시했지만 원고생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공손홍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학문의 정도(正道)가 어지러워져서 속설(俗說)이 유행하고 있네. 이대로 내버려두면 유서 깊은 학문의 전통은 결국 사설(邪說)로 인해 그 본연의 모습을 잃고 말 것일세. 자네는 다행히 젊은데다가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란 말을 들었네. 그러니 부디 올바른 학문을 열심히 닦아서 세상에 널리 전파해 주기 바라네. 결코 자신이 믿는 ‘학설을 굽히어[曲學]’이 ‘세상 속물들에게 아첨하는 일[阿世]’이 있어서는 안 되네.”
원고생의 말이 끝나자 공손홍은 몸둘 바를 몰랐다. 절조를 굽히지 않는 고매한 인격과 학식이 높은 원고생과 같은 눈앞의 태산북두(泰山北斗)를 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공손홍은 당장 지난 날의 무례를 사과하고 원고생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 공중누각(空中樓閣)
空:빌 공. 中:가운데 중. 樓:다랄 루. 閣:누각 각.
[유사어] 과대망상(誇大妄想).
[출전]《夢溪筆談》
공중에 떠 있는 누각[蜃氣樓(신기루)]이란 뜻. 곧 ① 내용이 없는 문장이나 쓸데없는 의론(議論). ② 진실성이나 현실성이 없는 일. ③ 허무하게 사라지는 근거 없는 가공의 사물.
등주(登州)는 사면이 바다에 임하여 봄과 여름철에는 저 멀리 하늘가에 성시누대(城市樓臺)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고장 사람들은 이것을 해시(海市)라고 이른다.
[登州四面臨海 春夏時 遙見空際 城市樓臺之狀 土人謂之海市(동주사면임해 춘하시 요견공제 성시루대지상 토인위지해시)]
훗날 청(淸)나라의 학자 적호(翟灝)는 그의 저서《통속편(通俗篇)》에서 심괄이 이 글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지금 언행이 허구에 찬 사람을 일컬어 ‘공중누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일을 인용한 것이다.
[今稱言行虛構者 曰空中樓閣 用此事(금칭언행허구자 왈공중누각 용차사)]
이처럼 ‘공중누각’이란 말은 이미 청나라 때부터 쓰여 왔으며, 심괄의 글 가운데 ‘해시’라는 것은 ‘신기루’를 가리키는 말이다.
☑ 과유불급(過猶不及)
過:지날 과. 猶:같을 유. 不:아니 불. 及:미칠 급.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뜻.)
어느 날 제자인 자공(子貢:B.C. 520~456)이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 자장(子張)과 자하(子夏) 중 어느 쪽이 더 현명합니까?”
공자는 두 제자를 비교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자장은 아무래도 매사에 지나친 면이 있고, 자하는 부족한 점이 많은 것 같다.”
“그렇다면 자장이 낫겠군요?”
자공이 다시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過猶不及].”
공자는 중용[中庸: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중정(中正)함]의 도(道)를 말했던 것이다.
[주] 자공 : 성은 단목(端木), 이름은 사(賜). 위(衛)나라 출신으로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한 사람. 정치에 뛰어난 후에 노(魯)나라‧위(衛)나라의 재상을 역임함. 제자 중에서 제일 부자였으므로, 경제적으로 공자를 도왔다고 함.
자하 : 성은 복(卜), 이름은 상(商). 공문 십철의 한 사람으로, 시문(詩文)에 뛰어난 후에 위(魏)나라 문후(文侯)의 스승이 됨. 공문 중에서 후세에까지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제자로, 공자가 산정(刪定)한 《시경(詩經)》《역경(易經)》《춘추(春秋)》를 전했다고 함.
☑ 과전이하(瓜田李下)
瓜:오이 과. 田:밭 전. 李:오얏 리. 下:아래 하.
[원말] 과전불납리 이하부정관(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뜻으로, 의심받을 짓은 처음부터 하지 말라는 말.)
전국 시대인 주(周)나라 열왕(烈王) 6년(B.C. 370), 제(齊)나라 위왕(威王) 때의 일이다. 위왕이 즉위한지 9년이나 되었지만 간신 주파호(周破湖)가 국정을 제멋대로 휘둘러 왔던 탓에 나라 꼴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그래서 이를 보다못한 후궁 우희(虞姬)가 위왕에게 아뢰었다.
“전하, 주파호는 속이 검은 사람이오니 그를 내치시고 북곽(北郭)선생과 같은 어진 선비를 등용하시오소서.”
“전하, 신첩(臣妾)은 이제까지 한마음으로 전하를 모신 지 10년이 되었사오나 오늘날 불행히도 간신들의 모함에 빠졌나이다. 신첩의 결백은 청천 백일(靑天白日)과 같사옵니다. 만약 신첩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瓜田不納履]’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李下不整冠]’고 했듯이 남에게 의심받을 일을 피하지 못했다는 점과 신첩이 옥애 갇혀 있는데도 누구 하나 변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신첩의 부덕한 점이옵니다. 이제 신첩에게 죽음을 내리신다 해도 더 이상 변명치 않겠사오나 주파호와 같은 간신만은 내쳐 주시오소서.”
위왕은 우희의 충심어린 호소를 듣고 이제까지의 악몽에서 깨어났다. 그러자 위왕은 당장 주파호 일당을 삶아 죽이고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았다.
☑ 관포지교(管鮑之交)
管:대롱 관. 鮑:절인 고기 포. 之:갈 지(‧‧‧의). 交:사귈 교.
[동의어] 관포교(管鮑交). [유사어] 문경지교(刎頸之交), 금란지교(金蘭之交), 단금지교(斷金之交), 수어지교(水魚之交), 교칠지교(膠漆之交), 막역지우(莫逆之友).
(관중(管仲)과 포숙아(鮑淑牙) 사이와 같은 사귐이란 뜻으로, 시세(時勢)를 떠나 친구를 위하는 두터운 우정을 일컫는 말.)
춘추 시대 초엽, 제(濟)나라에 관중(?~B.C. 645)과 포숙아 라는 두 관리가 있었다. 이들은 죽마고우(竹馬故友)로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관중이 공자(公子) 규(糾)의 측근(보좌관)으로, 포숙아가 규의 이복 동생인 소백(小白)의 측근으로 있을 때 공자의 아버지 양공(襄公)이 사촌 동생 공손무지(公孫無知)에게 시해되자(B.C. 686) 관중과 포숙아는 각각 공자와 함께 이웃 노(魯)나라와 거(莒)나라로 망명했다. 이듬해 공손무지가 살해되자 두 공자는 군위(君位)를 다투어 귀국을 서둘렀고 관중과 포숙아는 본의 아니게 정적이 되었다. 관중은 한때 소백을 암살하려 했으나 그가 먼저 귀국하여 환공(桓公:B.C. 685~643)이라 일컫고 노나라에 공자 규의 처형과 아울러 관중의 압송(押送)을 요구했다. 환공이 압송된 관중을 죽이려 하자 포숙아는 이렇게 진언했다. “전하, 제 한 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臣)으로도 충분할 것이옵니다. 하오나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시려면 관중을 기용하시오소서.” 도량이 넓고 식견이 높은 환공은 신뢰하는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大夫)로 중용하고 정사를 맡겼다. 이윽고 재상이 된 관중은 과연 대정치가다운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倉廩實則 知禮節(창름실즉 지예절)]’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衣食足則 知榮辱(의식족즉 지영욕)]’고 한 관중의 유명한 정치철학이 말해 주듯, 그는 국민 경제의 안정에 입각한 덕본주의(德本主義)의 선정을 베풀어 마침내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春秋)의 첫 패자로 군림케 하였다. 이같은 정치적인 성공은 환공의 관용과 관중의 재능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이긴 하지만 그 출발점은 역시 관중에 대한 포숙아의 변함없는 우정에 있었다. 그래서 관중은 훗날 포숙아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나는 젊어서 포숙아와 장사를 할 때 늘 이익금을 내가 더 많이 차지했었으나 그는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를 위해 한 사업이 실패하여 그를 궁지에 빠뜨린 일이 있었지만 나를 용렬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일에는 성패(成敗)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벼슬길에 나갔다가는 물러나곤 했었지만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운이 따르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싸움터에서도 도망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나를 겁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노모가 계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이다 [生我者父母 知我者鮑淑牙].’”
☑ 교언영색(巧言令色)
[반의어] 강의목눌(剛毅木訥), 성심성의(誠心誠意).
(발라 맞추는 말과 알랑거리는 태도라는 뜻으로,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첨하는 교묘한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표정을 이르는 말.)
공자[孔子:이름은 구(丘).B.C.551~479]는 아첨꾼에 대해 《논어(論語)》〈학이편(學而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발라 맞추는 말과 아랑거리는 태도에는 ‘인(仁)’이 적다.
[巧言令色 鮮矣仁(교언영색 선의인)]
말재주가 교묘하고 표정을 보기 좋게 꾸미는 사람 중에 어진 사람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을 뒤집어서 또 공자는 〈자로편(子路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강직 의연하고 질박 어눌한 사람은 ‘인’에 가깝다.
[剛毅木訥 近仁(강의목눌 근인)]
의지가 굳고 용기가 있으며 꾸밈이 없고 말수가 적은 사람은 ‘인(덕을 갖춘 군자)’에 가깝다는 뜻. 그러나 이러한 사람이라도 ‘인(덕을 갖춘 군자)’ 그 자체는 아니라고 공자는 〈옹야편(擁也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질 빈빈한 연후에야 군자라 할 수 있다.
[文質彬彬 然後君子(문질빈빈 연후군자)]
문(文:형식)과 질(質:실질)이 잘 어울려 조화를 이루어야 군사라는 뜻이다.
☑ 군자삼락(君子三樂)
君:임금 군. 子:아들 자. 三:석 삼. 樂:즐길 락, 좋아할 요.
[원말] 군자유삼락(君子有三樂) [유사어] 익자삼요(益者三樂)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는 말.)
전국 시대, 철인(哲人)으로서 공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맹자(孟子:B.C. 372?~289?)는 《맹자(孟子)》〈진심편(盡心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君子有三樂(군자 유삼락)]
첫째 즐거움은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요.
[父母具存 兄弟無故(부모구존 형제무고)]
둘째 즐거움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요.
[仰不傀於天 俯不怍於人(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
셋째 즐거움은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다.
[得天下英才 而敎育之(득천하영재 이교육지)]
한편 공자는 《논어(論語)》〈계시편(季시篇)〉에서 ‘손해 되는 세가지 좋아함[損者三樂(손자삼요)]’을 다음과 같이 꼽았다. 교락(驕樂:방자함을 즐김), 일락(逸樂:놀기를 즐김), 연락(宴樂:주색을 즐김).
☑ 기호지세(騎虎之勢)
[원말] 기수지세(騎獸之勢). [유사어] 기호난하(騎虎難下).
(호랑이를 지고 달리는 기세라는 뜻.)
① 중도에서 그만둘 수 없는 형세.
② 내친걸음.
남북조(南北朝) 시대 말엽인 581년, 북조 최후의 왕조인 북주(北周)의 선제(宣帝)가 죽자, 재상 양견(楊堅)은 즉시 입궐하여 국사를 총괄했다. 외척이지만 한족(漢族)이었던 그는 일찍이 오랑캐인 선비족(鮮卑族)에게 빼앗긴 이 땅에 한족의 천하를 회복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참에 선제가 죽은 것이다.
양견이 궁중에서 모반을 꾀하고 있을 때 이미 양견의 뜻을 알고 있는 아내 독고(獨孤) 부인으로부터 전간(傳簡)이 왔다.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기세이므로 도중에서 내릴 수 없는 일입니다[騎虎之勢 不得下].’만약 도중에서 내리면 잡혀 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호랑이와 끝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디 목적을 달성하시오소서.”
이에 용기를 얻은 양견은 선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나이 어린 정제(靜帝)를 폐하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문제(文帝)라 일컫고 국호를 수(隋)라고 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589년, 문제는 남조(南朝) 최후의 왕조인 진(陳:557~589)나라마저 멸하고 마침내 천하를 통일했다.
☑ 남가일몽(南柯一夢)
南:남녘 남. 柯:가지 가. 一:한 일. 夢:꿈 몽.
[동의어] 남가지몽(南柯之夢). 남가몽(南柯夢). 괴몽(槐夢).
[유사어] 한단지몽(한鄲之夢). 무산지몽(巫山之夢). 일장춘몽(一場春夢).
(남쪽 나뭇가지의 꿈이란 뜻.)
① 덧없는 한때의 꿈.
② 인생의 덧없음의 비유
당(唐)나라 9대의 황제인 덕종(德宗:780~804년) 때 광릉(廣陵) 땅에 순우분(淳于棼)이란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순우분이 술에 취해 집 앞의 큰 홰나무 밑에서 잠이 들었다. 그러나 남색 관복을 입은 두 사나이가 나타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괴안국왕(槐安國王)의 명을 받고 대인(大人)을 모시러 온 사신이옵니다.”
순우분이 사신을 따라 홰나무 구멍 속으로 들어가자 국왕이 성문 앞에서 반가이 맞이했다. 순우분은 부마(駙馬)가 되어 궁궐에서 영화를 누리다가 남가태수를 제수(除授)받고 부임했다. 남가군(南柯郡)을 다스린 지 20년, 그는 그간의 치적을 인정받아 재상이 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침공해 온 단라국군(檀羅國軍)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아내까지 병으로 죽자 관직을 버리고 상경했다. 얼마 후 국왕은 ‘천도(遷都)해야 할 조짐이 보인다’며 순우분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잠에서 깨어난 순우분은 꿈이 하도 이상해서 홰나무 뿌리 부분을 살펴보았다. 과연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을 더듬어 나가자 넓은 공간에 수많은 개미의 무리가 두 마리의 왕개미를 둘러싸고 있었다. 여기가 괴안국이었고, 왕개미는 국왕 내외였던 것이다. 또 거기서 ‘남쪽으로 뻗은 가지(南柯)’에 나 있는 구멍에도 개미떼가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남가군이었다.
순우분은 개미 구멍을 원상대로 고쳐 놓았지만 그날 밤에 큰 비가 내렸다. 이튿날 구멍을 살펴보았으나 개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천도해야 할 조짐’이란 바로 이 일이었던 것이다.
[주] 제수(除授) : 천거(薦擧)의 절차를 밟지 아니하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시킴.
☑ 노마지지(老馬之智)
老:늙을 로. 馬:말 마. 之:갈 지(…의). 智:슬기‧지혜 지.
(늙은 말의 지혜란 뜻으로,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저마다 장기나 장점을 지니고 있음을 이르는 말.)
춘추 시대, 오패(五霸)의 한 사람이었던 제(齊)나라 환공(桓公:재위 B.C.685~643) 때의 일이다. 어느 해 봄, 환공은 명재상 관중(管仲:?~B.C.645)과 대부 습붕(隰朋)을 데리고 고죽국[孤竹國:하북성(河北省) 내]을 정벌하러 나섰다.
그런데 전쟁이 의외로 길어지는 바람에 그 해 겨울에야 끝이 났다. 그래서 혹한 속에 지름길을 찾아 귀국하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전군(全軍)이 진퇴 양난(進退兩難)에 빠져 떨고 있을 때 관중이 말했다.
“이런 때 ‘늙은 말의 지혜[老馬之智]’가 필요하다.”
즉시 늙은 말 한 마리를 풀어놓았다. 그리고 전군이 그 뒤를 따라 행군한 지 얼마 안 되어 큰길이 나타났다.
또 한번은 산길을 행군하다가 식수가 떨어져 전군이 갈증에 시달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습붕이 말했다.
“개미란 원래 여름엔 산 북쪽에 집을 짓지만 겨울엔 산 남쪽 양지 바른 곳에 집을 짓고 산다. 흙이 한 치[一寸]쯤 쌓인 개미집이 있으면 그 땅 속 일곱 자쯤 되는 곳에 물이 있는 법이다.”
군사들이 산을 뒤져 개미집을 찾은 다음 그곳을 파 내려가자 과연 샘물이 솟아났다.
이 이야기에 이어 한비자(韓非子:韓非, ?~B.C.233)는 그의 저서《한비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관중의 총명과 습붕의 지혜로도 모르는 것은 늙은 말과 개미를 스승으로 삼아 배웠다. 그러나 그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어리석음에도 성현의 지혜를 스승으로 삼아 배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 아닌가.”
[주] ‘노마지지’란 여기서 나온 말인데 요즈음에도 ‘경험을 쌓은 사람이 갖춘 지혜’란 뜻으로 흔히 쓰이고 있음.
☑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
能:능할 능. 書:글 서. 不:아니 불. 擇:가릴 택. 筆:붓 필.
[출전]《唐書》〈歐陽詢傳>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 곧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데 종이나 붓 따위의 재료 또는 도구를 가리는 사람이라면 서화의 달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
당나라는 중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나라의 하나였다. 당시 서예의 달인으로는 당초 사대가(唐初四大家)로 꼽혔던 우세남(虞世南)‧저수량(褚遂良)‧유공권(柳公權)‧구양순(歐陽詢)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의 서체를 배워 독특하고 힘찬 솔경체(率更體)를 이룬 구양순이 유명한데 그는 글씨를 쓸 때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저수량은 붓이나 먹이 좋지 않으면 글씨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그 저수량이 우세남에게 물었다.
“내 글씨와 구양순의 글씨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낫소?”
우세남은 이렇게 대답했다.
“구양순은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으면서도[不擇筆紙]’ 마음대로 글씨를 쓸 수 있었다[能書]고 하오. 그러니 그대는 아무래도 구양순을 따르지 못할 것 같소.”
이 말에는 저수량도 두 손을 들었다고 한다.
또 ‘능서불택필’은 ①《왕긍당필진(王肯堂筆塵)》과 ②주현종(周顯宗)의 《논서(論書)》에 각각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①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 속설은 구양순까지이고, 그 이후의 사람들은 붓이나 종이를 문젯거리로 삼게 되었다.”
②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니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통설이라고 할 수 없다.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를 제외한 해서(楷書)‧전서(篆書)‧예서(隸書)를 쓰는 경우는 붓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에 붓을 가리지 않을 수 없다.”
☑ 다다익선(多多益善)
多:많을 다. 益:더할 익. 善:착할‧좋을‧잘할 선.
[동의어] 다다익판(多多益瓣) [출전]《史記》〈淮陰侯列傳>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는 뜻.)
한(漢)나라 고조 유방(劉邦)은 명장으로서 천하 통일의 일등 공신인 초왕(楚王) 한신(韓信)을 위험한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계략을 써 그를 포박한 후 회음후(淮陰侯)로 좌천시키고 도읍 장안(長安)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어느 날, 고조는 한신과 여러 장군들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이렇게 물었다.
“과인은 몇 만의 군사를 통솔할 수 있는 장수감이라고 생각하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께서는 한 10만쯤 거느릴 수 있으실 것으로 생각하나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예, 신(臣)은 ‘다다익선’이옵니다.”
“다다익선? 핫핫핫…‥.”
고조는 한바탕 웃고 나서 물었다.
“다다익선이란 그대가 어찌하여 10만의 장수감에 불과한 과인의 포로가 되었는고?”
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하오나 폐하,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옵니다. 폐하께서는 병사의 장수가 아니오라 장수의 장수이시옵니다. 이것이 신이 폐하의 포로가 된 이유의 전부이옵니다.”
☑ 대기만성(大器晩成)
大:클 대. 器:그릇 기. 晩:늦을 만. 成:이룰 성.
[대응어] 대방무우(大方無隅). [동의어] 대기난성(大器難成).
[유사어] 대재만성(大才晩成).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는 뜻.)
①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짐의 비유.
② 만년(晩年)이 되어 성공하는 일.
③ 과거에 낙방한 선비를 위로하여 이르던 말.
① 삼국 시대, 위(魏)나라에 최염(崔琰)이란 풍채 좋은 유명한 장군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촌 동생인 최림(崔林)은 외모가 시원치 않아서인지 출세를 못 하고 일가 친척들로부터도 멸시를 당했다. 하지만 최염만은 최림의 인물됨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했다.
“큰 종(鐘)이나 솥은 그렇게 쉽사리 만들어지는 게 아니네. 그와 마찬가지로 큰 인물도 대성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너도 그처럼 ‘대기만성’하는 그런 형이야. 두고 보라구. 틀림없이 큰 인물이 될 테니…….”
과연 그 말대로 최림은 마침내 천자(天子)를 보좌하는 삼공(三公)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②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25~57)때 마원(馬援)이란 명장이 있었다. 그는 변방의 관리로 출발하여 복파장군(伏波將軍)까지 된 인물인데, 복파장군이란 전한(前漢) 이후 큰 공을 세운 장군에게만 주어지는 칭호이다.
마원이 생전 처음 지방 관리가 되어 부임을 앞두고 형인 최황(崔況)을 찾아가자 그는 이렇게 충고했다.
“너는 이른바 ‘대기만성’형이야. 솜씨 좋은 대목이 산에서 막 베어낸 거친 원목을 시간과 노력을 들여 좋은 재목으로 다듬어내듯이 너도 네 재능을 살려 꾸준히 노력하면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부디 자중(自重)하라.”
③《노자(老子)》에도 ‘큰 네모[四角]는 모서리가 없으며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大方無隅 大器晩成]’는 말이 있다. 큰 인물은 짧은 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 긴 안목으로 봐 주자는 자애어린 이 말이, 요즈음에는 각 분야에서 ‘늦되는 사람’에게 위로 겸 농담조로 얼버무릴 때에도 쓰임.
☑ 동병상련(同病相憐)
同:한가지 동. 病:앓을 병. 相:서로 상. 憐:불쌍히 여길 련.
[유사어] 동우상구(同優相救), 동주상구(同舟相救), 동기상구(同氣相救), 동악상조(同惡相助),동류상구(同類相救), 오월동주(吳越同舟), 유유상종(類類相從).
전국시대인 기원전 515년, 오(吳)나라의 공자 광(光)은 사촌 동생인 오왕 요(僚)를 시해한 뒤 오왕 합려(闔閭)라 일컫고, 자객을 천거하는 등 반란에 적극 협조한 오자서(伍子胥)를 중용했다.
오자서는 7년 전 초나라의 태자 소부(太子少傅) 비무기(費無忌)의 모함으로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있던 아버지와 역시 관리였던 맏형이 처형당하자 복수의 화신이 되어 오나라로 피신해 온 망명객이었다. 그가 반란에 적극 협조한 것도 실은 유능한 광(합려)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부형(父兄)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초나라 공략의 길이 열릴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 해 또 비무기의 모함으로 아버지를 잃은 백비(伯嚭)가 오나라로 피신해 오자 오자서는 그를 오왕 합려에게 천거하여 대부(大夫) 벼슬에 오르게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오자서는 대부 피리(被離)에게 힐난을 받았다.
“백비의 눈길은 매와 같고 걸음걸이는 호랑이와 같으니[鷹視虎步], 이는 필시 살인할 악상(惡相)이오. 그런데 귀공은 무슨 까닭으로 그런 인물을 천거하였소?”
피리의 말이 끝나자 오자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뭐 별다른 까닭은 없소이다. 하상가(河上歌)에도 ‘동병상련’ 동우상구(同憂相救)란 말이 있듯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백비를 돕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지요.”
그로부터 9년 후 합려가 초나라를 공략, 대승함으로써 오자서와 백비는 마침내 부형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오자서는 불행히도 피리의 예언대로 월(越)나라에 매수된 백비의 모함에 빠져 분사(憤死)하고 말았다.
[주] 오자서 : 춘추 시대의 초(楚)나라 사람. 이름은 원(員). 초나라의 태자소부(太子少傅) 비무기(費無忌)의 모함으로 아버지 오사(吳奢)와 형 오상(伍尙)이 초나라 평왕(平王)에게 처형당하자 오나라로 망명함. 9년 후 오왕 합려를 도와 초나라의 도읍 영(郢)으로 쳐들어가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어 300대나 매질하고 나서야 원한을 풀었다고 함.
[참조] 일모도원(日暮途遠).
☑ 마이동풍(馬耳東風)
馬:말 마. 耳:귀 이. 東:동녘 동. 風:바람 풍.
[유사어] 우이독경(牛耳讀經). 오불관언(吾不關焉). 대우탄금(對牛彈琴).
(말의 귀에 동풍(東風:春風)이 불어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뜻.)
①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그대로 흘려버림의 비유.
② 무슨 말을 들어도 전혀 느끼지 못함의 비유.
③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음의 비유.
당나라의 대시인 이백(李白)이 벗 왕십이(王十二)로부터〈한야독작유회[寒夜獨酌有懷(추운 방에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느낀 바 있어서)]〉라는 시 한 수를 받자 이에 답하여〈답왕십이한야독작유회(答王十二寒夜獨酌有懷)〉라는 시를 보냈는데 ‘마이동풍’은 마지막 구절에 나온다. 장시(長詩)인 이 시에서 이백은 “우리네 시인들이 아무리 좋은 시를 짓더라도 이 세상 속물들은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울분을 터뜨리고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
세인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머리를 흔드네
[世人聞此皆掉頭(세인문차개도두)]
마치 동풍이 쏘인 말의 귀처럼
[有如東風射馬耳(유여동풍사마이)]
[주] 동풍은 봄바람의 뜻. 그 동풍이 말의 귀를 쏘아(스쳐) 봤자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을 것임. 즉 세인들이 시인의 말이나 걸작에 기울이는 관심도가 그 정도로 낮다 - 무관심하다고 이백은 비분(悲憤)하고 있는 것임.
☑ 맹모삼천(孟母三遷)
孟:맏 맹. 母:어미 모. 三:석 삼. 遷:옮길 천.
[원말]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유사어] 현모지교(賢母之敎). 맹모단기지교(孟母斷機之敎).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교사.)
전국 시대, 유학자(儒學者)의 중심 인물로서 성인(聖人) 공자에 버금가는 아성(亞聖) 맹자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손에 자랐다.
맹자의 어머니는 처음 묘지 근처에 살았는데 어린 맹자는 묘지 파는 흉내만 내며 놀았다. 그래서 교육상 좋지 않다고 생각한 맹자의 어머니는 시장 근처로 이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건을 팔고 사는 장사꾼 흉내만 내는 것이었다. 이곳 역시 안 되겠다고 생각한 맹자의 어머니는 서당 근처로 이사했다.
그러자 맹자는 제구(祭具)를 늘어놓고 제사 지내는 흉내를 냈다. 서당에서는 유교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예절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맹자의 어머니는 이런 곳이야말로 자식을 기르는데 더할 나위 없이 놓은 곳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 명경지수(明鏡止水)
明:밝을 명. 鏡:거울 경. 止:그칠 지. 水:물 수.
(맑을 거울과 조용한 물이라는 뜻으로, 티없이 맑고 고요한 심경을 이르는 말.)
《장자(莊子)》〈덕충부편(德充符篇)〉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춘추 시대, 노(魯)나라에 왕태(王駘)라는 학덕이 높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유교의 비조(鼻祖)인 공자와 맞먹을 만큼 많은 제자들은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서 공자의 제자인 상계(常季)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 저 올자(兀者)는 어째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흠모를 받고 있는 것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그것은 그분의 마음이 조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거울 대신 비쳐볼 수 있는 물은 흐르는 물이 아니라 가만히 정지(靜止)해 있는 물이니라.”
또 같은〈덕충부편〉에는 이런 글도 실려 있다.
“거울에 흐림이 없으면 먼지가 앉지 않으나 먼지가 묻으면 흐려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오랫동안 현자(賢者)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맑아져 허물이 없어진다.”
[주] 올자 : 형벌(刑罰)에 의해 발뒤꿈치를 잘린 불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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